검은 꽃이 피기까지

애초에 하려고 했던 일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생각지도 않던 엉뚱한 일만 남은 것을 일컫는 사자성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른 분야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창작의 세계에선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어떤 문학평론가는, 본래 쓰려던 것을 쓰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 노동이라고 말한 바 있기도 하다. 옳거니. 맞는 말씀이다. 자기가 뭘 하려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나는 가끔 무섭다. 그건 그렇고.

 

그 영화감독은 영화로 유명하다는 뉴욕대를 졸업한 패기만만한 친구였다. 이십대에 이미 35미리 장편 영화의 감독이 되었는데 흥행에는 참패했다. 그래도 영화제에선 가끔 불러주는지 이탈리아 어느 시골에서 열린 영화제에서 스타가 된 이야기를 가끔 하곤 했다. 포도를 밟아 와인을 만드는 시실리의 어린 처녀들이 잘생긴 이십대의 영화 감독을 따라다니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유쾌하다. 엉뚱한 곳에서 생각지도 않은 환대를 받고, 그런가하면 팡파레를 기대했던 곳에서 썰렁한 침묵의 야유를 받게 되는 것, 그런 게 있어야 인생에는 어떤 활력이 생겨난다.

 

그 감독은 찍고 싶은 영화가 많았다. 우리는 2000년에 만났는데 그는 미국식으로 일하고 있었다. 내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며 집 근처로 찾아와 무턱대고 함께 시나리오를 쓰자고 했다. 아무래도 나는 점잔빼며 탐색하는 사람들보다는 그런 저돌적인 사람에게 끌리는 편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게 치장한 느와르적 풍모가 거슬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청운의 꿈을 품고 고국으로 돌아와 영화계에 투신한 젊은 교포의 열정을 꺾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뉴욕대 선배 중에는 뉴욕 근처에도 안 가봤을 것 같이 생긴 곽경택이라는 감독이 있었는데 그 무렵 <친구>라는 도저히 흥행할 것 같지 않은 제목의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 무슨 영화를 하시려는 겁니까?"
"뭐든지 자신 있습니다. 시나리오만 써주시면 멋지게 만들겠습니다."

듣는 사람이야 기분 좋았지만 뭐든지 잘 만들 수 있다는 그 자신감은 과도해 보였다. 자기도 좀 그랬는지, "단, 뮤지컬만 빼구요."라고 토를 달았다. 몇 차례의 술자리 끝에 나는 그가 정말 만들고 싶어하는 장르는 역시 느와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패션이 말해준 것이 진실이었다.

 

나는 그와 일하기로 했다. 그는 신이 나서 영화사를 섭외하러 다녔다. 몇몇 회사가 그의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였다. LA의 교포 건달들이 등장하는 데뷔작이, 내용의 완성도나 만듦새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지만, 그 화려한 스타일만큼은 영화판에서 눈길을 끌었던 모양이었다. 특히 <장군의 아들> 이후 액션 영화에 목말라 있던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 같은 사람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어쨌든 흘러흘러 그는 대형 블록버스터를 줄줄이 기획하고 있던 신생 영화사와 계약을 맺었고 그와 나는 연세대 내에 있는 한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 시나리오를 썼다. 영화감독이라는 게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 할 일도 없는 날건달 같은 직업인지라 내가 책상에 앉아 써내려 가는 동안 그는 내내 옆에서 커피며 김밥이며를 갖다 바치며 어서 메가폰을 잡을 날이 오기만 바라고 있었다.

 

그는 유달리 감동을 잘하는 성격이었다. 내가 몇 장 쓰면 그걸 보고 감탄 또 감탄하는 것이 일과였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강하게 자기 의견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는 자기 영화에 반드시 넣고 싶어하는 어떤 장면, 어떤 분위기가 있었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그는 아르바이트 삼아 잠깐잠깐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장나라라는, 이름만 봐서는 도저히 뜰 것 같지 않은 무명가수의 데뷔 뮤직비디오를 찰리 채플린 스타일로 강원도 탄광에서 찍어오기도 했는데 주문한 회사에서는 신인가수 얼굴에 숯검댕이가 웬말이냐며 항의하는 바람에 결국 그 실험적인 비디오는 거의 사장되고야 말았다.

 

어쨌든 시나리오의 초고가 나왔다. 영화사에는 회의를 하더니 이대로는 흥행성이 없다고 했다. 다시 합숙에 들어가 2고가 나왔다. 회의가 다시 열렸는데 전보다 더 심해졌다고들 했다. 다시 3고가 나왔고 영화사에서는 당분간 프로젝트를 보류하는 게 좋다고 했다. (실망한) 그와 (어느 정도는 이런 사태를 예상했던) 나는 술집을 전전하며 예술을 몰라주는 세태를 원망하며 술을 퍼마셨는데 그때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나왔다(역시 예술은 배가 고파야).

 

소위 '일레븐 데스페라도'의 구상도 그때 나왔다. 미국에 다녀오던 그가 비행기에서 들었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구한말인가 일제시대엔가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팔려갔는데, 그 사람들이 나중에 엘살바도르인가로 옮겨가 거기에 나라를 세웠다가 몰살당했다는, 다소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떠난 연도는 1905년이고 간 곳은 하와이가 아니라 멕시코였고 마지막에 가서 죽은 곳도 엘살바도르가 아니라 과테말라였다. 어쨌든 그는 (미구에 자신이 만들) 그 영화의 라스트신만큼은 확실하게 그려놓고 있었다. 11명(왜 11명인지는 모른다)이 마야의 피라미드 위에서 멕시코제 기관총을 쏘다 장렬히 몰살당하는 것이었다. 거기가 엘살바도르이든 파나마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마카로니 웨스턴이나 존 포드 식 서부영화의 황량한 라스트가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수첩에 적었다. 별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때는 뭐든지 다 적던 시절이었다. 그런 영화가 만들어질 수는 있겠지만 그게 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도대체 엘살바도르에서 몰살당한 사람들과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그 구상을 적은 300원짜리 수첩을 서랍 속에 처박아두고 잊어버렸다.

 

시간이 흘러 팜므파탈이 등장하는 내 시나리오는 허공으로 날아갔다. 영화사에선 그래도 신의를 지켜 나머지 잔금을 치러주었고 나는 그쪽에서 완전히 손을 털었다. 그후 그 감독은 미국에서 혼자 썼던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사들을 전전하며 몇 군데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듣기도 하고 또 막간에 뮤직비디오도 몇 편 찍으면서 세월을 보냈고 나는 나대로 소설에 전념하느라 그를 통 만날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상을 정리하는데 그 수첩이 눈에 띄었다. 물끄러미 수첩에 적힌 글귀들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처음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 떠올랐다. 총질이나 하는 마카로니 웨스턴 풍의 영화 말고 좀더 진지하고 근사한 그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내 역시 옆구리를 찔렀다. '왜 그렇고그런 서부극이 될 거라고 생각해? 당신이 쓰면 다를 거야.' 돌아보면, 지난 세기에 내가 저지른 모든 일이 미친 짓이었는데 오직 결혼만이 예외였다.

 

나는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가 2001년이었다. 감독에겐 가끔 전화가 왔다. 나는 그 구상을 소설로 쓸 거라고 말했다. 그 무렵 그 감독은 한 신생 영화사의 창립 멤버가 되어 자기 방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호기롭게, "혹시 취재 경비가 필요하면 저희 회사에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큰소리를 쳤다. 충무로에 돈이 개똥처럼 흔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제작 경비를 지원받으며 소설을 쓰는 작가는, 내가 알기로는 없다. 또 그렇게 써서 과연 좋은 소설이 나오겠는가. 게다가 내 마음속에서 이 소설은 점점 영화라는 미디어와 멀어지고 있었다. 영화와는 무관하게 철저히 소설적인 그 무엇이 내 안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자료를 통해 속속 사건의 정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905년 1033명의 조선인이 멕시코행 배에 오르는 것이다. 하와이 이민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대한제국의 퇴역군인들을 주축으로 신부와 내시, 무당과 몰락 양반이 한데 어우러진 이들은 4년 계약을 맺고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게 되지만 계약이 만료된 후에도 돌아오지 못한다. 이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나라는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돌아와봐야 별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1910년, 유명한 멕시코 혁명이 시작된다. 에밀리아노 사파타, 판초 비야, 오브레곤이 등장하는 멕시코 역사상 최고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조선인들 중 일부도 혁명에 휩쓸리고 또 일부는 쿠바 등지로 옮겨간다. 1916년, 여전히 유카탄 반도에 남아 있던 젊은 남자들은 과테말라에서 벌어진 내전에 용병으로 참전했다가 무정부 상태인 과테말라 북부 밀림에 작은 나라를 세운다. 이 사건은 1916년 신한민보, 1922년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서도 확인이 되었다.

 

문제는 <애니깽>이었다. 그 영화를 본 사람은 내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제대로 개봉도 못하고 막을 내린 영화였다. 주연배우인 임성민이 촬영 중에 죽는 바람에 영화가 엉망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도 모두가 그 얘기를 했다. 내가 구상을 꺼내놓기만 하면 '어, 그거 애니깽이잖아?'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모두 흥미를 잃었다. 상황이 심각했다.

 

그러나 분명 그 이야기에는 내 영혼을 미혹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나는 누가 뭐래도 써야만 했다. 어쩌면 '유랑'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유랑. 나의 아버지는 오사카 근교의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만주를 떠돌던 할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가 해군 조선소 곁에 노동자들을 상대로 함바집을 열었다. 거기에서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태어났다. 대대로 빈농의 후손이었던 할아버지는 악착같이 일해 땅을 살 돈을 모았다. 꽤 수완이 좋았던지 그는 해방 전에 이미 논 마지기를 사기에 충분한 돈을 모아 고향의 처가로 보냈다. 할머니네 집에서는 물론 그 돈으로 논을 샀다.

 

해방이 되자 할아버지는 일본에서의 장사를 접고 할머니, 그리고 자식들과 함께 요코하마에서 귀국선을 탔다. 그러나 고향에선 엉뚱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 할아버지의 돈으로 산 땅 중에서 일부가 처가 쪽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토지개혁을 거치며 할아버지는 부재 지주로 분류되었던 것 같고 처가 쪽에선 땅을 잃지 않기 위해 경작을 하던 자신들의 이름을 등기부에 올렸던 것 같고 그러다보니 애초부터 그게 누구 땅이었는지 불분명해진 것이었으리라. 해방 후엔 그런 일이 흔했으니까. 어쨌든 그 후로 두 집안은 사이가 틀어졌다. 땅이 거기 있는 한, 그들의 화해는 어쩌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만주와 오사카를 거쳐 다시 고령으로 돌아오는 동안 그는 자식들을 낳아 먹이고 길렀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뇌졸중으로,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났고 나는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었다. 초등학교를 마치자 집에서는 더 이상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는 가출하여 대구로 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혼자 힘으로 야간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사병으로 입대하여 장교가 되었고 몇 년 후 배를 타고 월남으로 떠났다. 바로 그해에 내가 태어났다. 그곳에서 벌어온 돈으로 부모는 서울의 외가 근처에 집을 샀다. 그런데 집장사가 사기꾼이었다. 월남에서 번 돈을 하루 아침에 날린 것이었다. 만약 내 부모가 그때 서울에 집을 장만했더라면 내 어린 날의 유랑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화천에서 태어나 대구(여기에서 내 동생이 태어났다)로, 광주, 진해, 양평, 파주를 거쳐 서울로 입성했다. 1년에 한 번씩 전학을 다녔고 매번 새로운 언어와 게임의 규칙을 익혔다. 나는 빨리 잊고 빨리 배우는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유랑의 서사에 매혹되었는지도 모른다. 1996년의 나는 내 소설의 주인공의 입을 빌어,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라고, 제법 폼을 잡고 인생에 대해 아는 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그건 그저 내 바람에 지나지 않았을 지 모른다. 사실 멀리 떠나면 모든 것이 변한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고 국가나 이념, 종교와 언어는 모두 그 다음 문제다. 미국으로 떠난 이민자들은 개신교도가 되고 탈북자들은 누구보다 열렬한 자본주의 신봉자가 된다.

 

나는 아내와 함께 멕시코행 항공편을 타고 멕시코로 날아갔다. 생각 같아서는 이민자들의 행로를 따라 배를 타고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멕시코까지 날아가는 비행기만 해도 천신만고였다. (어쩐지 이상하게도 값이 쌌던) 이 비행기는 도쿄와 밴쿠버를 들러 승객을 태우고 가는 바람에 바람에 물경 24시간이 다 걸려서야 치안상태 불량한 걸로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멕시코시티 공항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멕시코시티는 그 자체로 라틴아메리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품고 있었다. 인상적인 유물, 가면, 도자기, 피라미드 같은 좋은 쪽으로부터 도둑, 택시강도, 매연, 오염, 무절제, 카니발적 광기, 경제 불안과 같은 나쁜 쪽까지, 모든 것을 다 아우르는 광범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라틴 아메리카 여행을 시작하는 곳으로는 그만이다.

 

나는 멕시코시티에서 무사히 일주일을 머무른 후, 비행기를 타고 유카탄 반도의 거점 도시인 메리다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1905년의 조선인들이 각 농장으로 팔려갔다. 나는 메리다에 여장을 풀고 본격적으로 그들의 흔적을 찾아나섰다(어떤 신문은 '그들'을 '조상', 혹은 '선조'라고 쓰고 내 여행을 '조상들의 흔적을 찾아 나선 고난의 여정'으로 표현했다. 내 소설 어디에도 그런 표현은 없다. 그들은 내 조상이 아니라 1905년 제물포를 떠난 1033명의 조선인들이다. 내 소설에선 이 점이 중요하다. 민족은 가족이 아니다. 나는 몇 번이고 거듭하여 '민족의 수난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민족의 수난사'가 되는 지점에서 소설은 끝나고 '8.15 특집극'이 시작된다).

 

나는 가능하면 그들처럼 먹고 그들처럼 자려고 노력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에네켄 농장들은 황무지가 되어 있었고 유카탄 반도엔 마야유적들을 찾는 관광객들만 북적거렸다. 수소문 끝에 택시를 대절하여 찾아간 농장 역시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박물관으로 변해 있었다. 한때 채무노예들이 북적거렸을 들판엔 녹슨 무개차와 레일이 깔려 있었고 창고엔 에네켄 삼실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수북히 쌓여 있었다. 농장주의 저택에서 버스를 타고 온 미국 관광객들이 유카탄의 전통 음식을 먹고 있었다. 햇볕은 뜨거웠고 바람이 불 때마다 먼지가 구름처럼 일어섰다.

 

당시의 조선인들이 세웠던 숭무학교 건물은 전자제품 대리점이 되어 있었다. 남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은 천천히 멕시코라는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 완전히 사라졌다. 모든 것이 사라진 곳에서 소설이 시작되었다. 나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과테말라로 향했다. 기이한 것은 그들이 나라를 세우고 죽어간 띠깔 역시 지금은 과테말라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밀림 사이로 우뚝 솟은 띠깔의 피라미드들을 보러 일 년에 수십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관광지가 됨으로써 '그들'의 흔적은 더 빨리 사라졌다. 나는 관광객의 한 사람이 되어 가이드를 고용하고 그가 이끄는 대로 밀림을 지나고 열대의 새들을 만나고 피라미드에 오르고 허름한 식당에서 콜라와 살사 소스에 버무린 닭요리를 먹었다.

 


며칠 후 나는 해발 1500미터에 위치한 안티구아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소설의 나머지 부분을 썼다. 그리고 몇 달 후, 도저히 영화화할 수 없는 1350매짜리 장편 소설을 탈고했다. 너무 많은 인물과 너무 광활한 지역이 나오는, 헐리우드조차도 시도하기 어려울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 감독에겐 미안하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애초에 하려던 일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을 일컫는 한자성어가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아직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인생의 버스는 항상 엉뚱한 곳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1905년의 그들처럼.


김영하 - <검은 꽃이 피기까지>

by 쿨쿨쿨 | 2005/01/25 22:04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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