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경계 긋기의 어려움

고종석 2007.8

두달 전 이 난에 쓴 <경계 긋기의 어려움>에서, 나는 “삼성 제품을 기꺼이 사 쓰면서 조선일보를 지네 보듯 하는” 내 윤리가 논리적으로 가지런한지 물었다. 그 글이 나가고 얼마 뒤, 지면을 통해서만 알고 있는 칼럼니스트 한분이 메일을 보내주셨다. 글의 논지를 따지는 메일은 아니었다. 그이는 가볍게 조선일보 (기자들) 얘기를 했다.


바깥에서 보는 매체의 이미지와 사적으로 겪은 그 매체 기자들의 됨됨이는 다를 수 있다고 전제한 뒤, 그이는 자신이 가장 ‘나이스’하다고 느낀 기자들이 조선일보 기자들이라고 말했다. 이런저런 신문 잡지들에 글을 쓰며 기자들과 얽혀본 경험으로는, 조선일보 기자들이 필자들에게 가장 섬세히 마음을 써준다는 것이었다. 거드름을 안 떠는 기자들은 조선일보 기자들뿐이라고도 했다.


없는 일을 그이가 지어냈을 리는 없다. 좋고 싫음은 순전히 개인 차원의 문제라는 점을 떠나서도, 조선일보라 해서 어떻게 두루두루 ‘나이스’한 기자가 없겠는가? 나만 해도 ‘나이스’한 조선일보 기자를 사적으로 몇 알고 있다. 그래서 다시, 경계 긋기는 어려워진다.

이를테면 내가 이념적으로 한겨레에 이끌리고(한겨레에 무슨 이념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윤리적으로 한겨레가 옳다고 판단하더라도(늘 윤리적일 순 없겠지만 한겨레 지면이 일정한 윤리적 충동에 휘둘리는 것은 또렷해 보인다), 그 이끌림과 판단이 한겨레 구성원 개개인에게 고스란히 옮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념이나 윤리를 기준으로 조선일보와 한겨레에 어떤 경계를 그어놓고 보면, 이내 (사적으로 알고 있는) 딱하다 싶을 만큼 매력 없는 어떤 한겨레 기자들과 (역시 사적으로 알고 있는) 넉넉히 매력적인 어떤 조선일보 기자들이 떠올라 마음이 스산해진다. 그 매력은 재능만이 아니라 됨됨이(예의나 겸손이나 너그러움이나 신의 같은 미덕으로 이뤄지는 개인윤리)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조선일보 기자들이 자주 ‘나이스’할 수 있는 건 포실한 물적 조건 덕분일 따름이라고 자신을 설득하려 해도, 그런 개인들에 대한 느낌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사실 <경계 긋기의 어려움>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내진 않았으나, 경계 긋기의 큰 어려움은 집단 퍼스낼리티와 개인 퍼스낼리티의 그런 어긋남에서도 온다. 나는 민주노동당에 그럭저럭 호의적이지만, 어떤 민주노동당 당원이나 지지자에 대해 좋지 않은 느낌을 지니고 있다. 어떤 민주노동당 지지자들 역시 내게 그런 느낌을 지녔을 것이다. 나는 또 한나라당의 역사와 현재에 대단히 부정적이지만, 어떤 한나라당 당원이나 지지자에 대해서는 싫지 않은 느낌을 지녔다. 어떤 한나라당 지지자들 역시 때론 내게 그런 느낌을 지닐 수도 있을 게다. 실제로 술자리에서 가끔 어울리는 친구 하나는 한나라당 지지자다. 게다가 조선일보 독자다. 내가 그 친구와 어울리는 것은 그 친구에게서 (최소한의 개인윤리까지를 포함한, 그러나 다분히 주관적인) 어떤 매력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혼란일 수도 있다. 그 혼란은, 이념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집단윤리로 한 개인이 완전히 환원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자신이 내세우는 이념을 적잖은 개인들이 일상생활에선 아예 팽개치고 있다는(사회적 발언권이 큰 공직 사회 안팎의 명망가들 가운데 이런 이들이 많겠지만, 별다른 이념도 그 이념에 대한 발언권도 없는 소시민들 역시 이런 표리부동에서 늘 자유로울 수만은 없을 게다) 점 때문에 그 혼란은 더욱 더 커진다.


그러나 그런 개인과 개인 사이의 좋고 싫은 느낌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양식’의 일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나부터 깔끔히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양식이긴 하다.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어떤 여성이 교양이 철철 넘쳐흐르고 더구나 너그럽기까지 할 때, 그 교양과 너그러움을 뒷받침하는 물적 조건의 윤리성을 따져보는 것은, 그리고 그 여성에 대한 호감의 윤리성을 따져보는 것은, 특히 나처럼 개인주의적인 사내한텐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런 한편, 그 여성에게 온통 넋을 잃고 그 매력의 사회경제적 맥락에 무심한 채 산다면, 문득 슬플 것 같다. 부끄러울 것 같다.


사람들 사이의 좋고 싫음이 늘 윤리나 논리의 그물에 잡히는 것은 아니다. ‘괜히 좋다’거나 ‘괜히 싫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좋고 싫음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그 호오가 윤리의 논리를, 또는 논리의 윤리를 완전히 동강내서는 안 될 것 같다. 민주노동당이 괜찮은 정당인지 형편없는 정당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나라당은 형편없는 정당이다. 이것은 그 당의 어떤 당원이나 어떤 지지자가 괜찮은 사람인 것과는 무관하다. 한겨레가 괜찮은 신문인지 형편없는 신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조선일보는 형편없는 신문이다. 이것은 그 신문의 어떤 기자가 괜찮은 사람인 것과는 무관하다.


21세기에 고종석이 쓴 글 중 가장 명문.
흡사 택견 고수의 발차기를 보는 듯하다.
설렁설렁, 흔들흔들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팍!!
사안이 무엇이든, 무언가를 자신 있게 말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인데
그 어려움을 계속 염두에 두면서도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을 다 하는 것.
글을 쓰다 막히면 몇 번씩 되풀이해 읽곤 하는 글.

by 쿨쿨쿨 | 2008/05/22 22:21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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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8/05/27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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